EBS지식채널 (E)2 #5 "주도면밀한 희대의 사기꾼 찰리 채플린"
"쇼는 끝났다. 사람들은 더이상 상상하지 않는다."
1889년 4월 16일 불우한 영국의 한 가정에서 탄생한 찰리 채플린은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극단에 들어갔다.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재능을 인정받은 찰리는 17살이 될면서 당시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희극극단에 들어가게되었다. 이극단에서 본격적으로 춤과 노래
어릿광대 분장을 하고 광대 연기를 배웠으며 판토마임을 배우는등 희극배우가 가져야할 자질들을 체계적으로 배우게 된다.
이극단은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순회공연을 하게되었는데 이때 우연히 찰리 채플린의 공연을 보게된 영화제작자 M.세넷은
채플린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그의 연기에반해 그를 미국 영화에 데뷔시킨다.
'사람과 사물의 소리없는 표정들
그리고
그의 눈과 눈썹, 눈동자, 팔다리의 움직 만으로
채플린은 그의 방식만으로 영화밖의 사람들에게
말을걸기 시작했다.'
1914년 채플린의 첫영화가 개봉되었고 이 무렵 채플린이 선보였던 콧수염, 실크햇, 모닝코트, 지팡이등..의
채플린만의 특별한 복장과 개성 넘치는 연기는 미국 무성영화계에서 큰 인기를 끌게된다.
그의영화는 단순한 희극요소만으로 구성된 영화와는 달랐다. 심오한 비유적 의미를 우수꽝 스러운 몸동작이나 표정으로 표현했으며
당시 사회와 세계의 무거운 주제도 해학적으로 통렬한 사회 비판적인 메세지를 표현하기도 했다.
이점이 관객들의 전폭적인 열광을 이끌어낸것이다.
'채플린의 표정과 몸짓을 보며 사람들은 몰입했고 상상했다.
그리고 마침내 1928년 유성영화 시대의 막이올랐다.
유성영화의 시대에도 그는 여러편의 무성영화를 발표하며 유성영화 속에서도 무성영화를 걸작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1931. [씨티 라이트] 1936. [모던타임즈] 에선 당시 현대사회의 기계만능 주의와 그로인한 인간소외를 날카롭게 풍자하였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에는 [독재자]를 발표하며 '히틀러'라는 희대의 독재자와 파시즘을 풍자하기도 했으며
1947. 살인광 시대 에서는 전쟁이란 명목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자본주의적 제국질서를 비난하기도 했는데
당시 미국 사회에서 비판적인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오해를사 심한 박해를 받기도 했다.
1952년 미국사회의 물질만능주의와 쇼비지니스에 환멸을 느낀 채플린은 결국 미국을 떠나 스위스에 정착하게 된다.
1972년 미국은 뒤늦게 채플린의 영화와 그의 해학적 사회비판의 예수럭 공로를 인정해 아카데미 특별상을 수려했지만
여전히 스위스에서 평화로운 말년을 보내던 채플린은 1977년 조용히 생을 마감한다.
"채플린의 연기 그것은 말로 표현되지 않는
인간의 감정에 대한 탐구였다"
-우디 앨런-